Travel/'22 여름 싱가포르 4박6일(完)

9. 2일차 - Atlas Bar

ごろごろ 2022. 9. 29. 14:56

Atlas Bar

일단 이전편 클락키를 구경할때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긴 했으나

내려봤자 얼마나 내리겠어 ㅎㅎ 하는 생각에 우산을 챙기지 않고 호기롭게 나갔다가

우박 직전까지 굵어진 빗줄기에 호되게 쳐맞고 문자 그대로 물에 빠진 생쥐(쥐띠입니다)

꼴이 되어 호텔로 다시 돌아와 몸을 말렸습니다.

 

괜히 뻘짓하다가 크게 한것도 없이 시간이 많이 흘러 더이상 낭비하지 않고자

몸을 다 말리자마자 버스를 타고 오늘의 마지막 일정 Atlas Bar로 향합니다.

 

아틀라스 바는 인터넷 예약이 90일 전부터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열리고

하도 인기가 많아 여행 준비를 뒤늦게 시작한 저는

당연하게도 방문 예정일자에 맞춰 예약을 성사시킬 수 없었습니다.(만석)

 

이러한 이유로 방문하기 전부터 자리가 없을 경우 장시간 대기할 각오였고

실제로도 입구 앞 대기열에 사람들이 주루룩 기다리고들 있었는데

천운이 따랐던건지 제가 도착하기 직전에 가장 선호하는 카운터석 단 한자리가 났다는것을

매니저를 통해 안내받고 바로 입장하였습니다.

자리로 이동하며 아임 쏘 럭키~ 하니 반응해 주시더라구요 ㅎㅎ 기분 좋습니다.

 

Atlas Bar. Asia Best Bar 23위

이번 여행 최고의 한장

 

1910~30년대 미국 분위기가 물씬 나는듯합니다.(역사는 잘 몰라잉)

제가 사진 보정을 조금 많이 먹여서 그렇지 실제로는 조금 더 어둡고 아늑합니다.

두껍게 깔린 레드카펫 덕분에 사람들의 대화소리는 거슬리진 않았습니다.

 

아틀라스 바의 자랑 전세계에서 모인 진 콜렉션의 타워. 자체 제작 진도 있다

좌석은 2~4인용 테이블이 25개, 카운터석이 12개 정도 있습니다.

어차피 커플이나 단체 손님이 더 많아서 앉을 가능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겠지만

안그래도 필자는 바에선 테이블보다 카운터석을 더 선호합니다.

 

상시 혈혈단신으로 여기저기 다니다보니 대화 상대가 생기는 것도 재밌고...

갓 위스키&칵테일 취미에 입문한 단계라 이것저것 물어보고 대화하며

바텐더분께 전문적인 지식을 배우고 취향을 얘기하다가 주문하거나 추천받으면

높은 확률로 제 선호에 맞는 술을 찾아가는데 용이해서 몹시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안그래도 비싼 술들이 바에선 더 비싼 이유가

위에서 말한 비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기본안주 자색고구마칩. 짭짤해서 자꾸 손이간다
Tulip of Champagne. 난 뭐 샴페인 베이스 칵테일인줄 알았더니 진짜 샴페인이였음

이 날도 그렇고 이후로도 싱가폴에서 식사를 시작할때 샴페인을 많이 주문하게 됩니다.

날이 더우니 시원하고 산뜻한 탄산으로 목을 축이고 싶기도 하고,

적당한 단맛이 침샘을 깨워 입맛을 불러 일으키기도 때문입니다.

 

동시에 식사에 돈을 쓰려다보니 한층 더 고급 단계의 식당에 방문하게 되고,

이런 식당들은 보통 샴페인 한두종류 정도는 각기 다르게 구비하고 파는 경우가 많으니깐

이것저것 맛보는 측면에서도 유용한 경험입니다.

 

다 아는 얼굴들이구먼
pork collar, pancetta jus, sweetheart cabbage, roast garlic mousseline

아틀라스 바는 점심에는 애프터눈 티도 운용하고

저녁-밤에는 식사 및 안주도 주문이 가능한 다이닝 바 이기도 합니다.

계획했던 저녁도 못먹었겠다, 갖은 피로 누적으로 녹초가 되어 허기도 상당히 진 상황이라

메뉴를 보며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다른 날 식사랑 겹치지 않게 돼지고기로 주문했습니다.

 

이거는 또 여행 준비단계에서는 생각치도 못했던 메뉴인데

기막히게 맛있었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 그런것도 있었겠지만

돼지고기는 삼겹살 두께만큼 두꺼우면서도 속까지 하얗게 잘 익었으면서 부드럽고

질기거나 딱딱한 부분이 하나도 없으며

지방과의 비율이 적절해 맛있게 씹고 목으로 넘길때의 그 풍미가 부드러웠습니다.

 

고기 맛은 삼겹살과 베이컨 그 중간 어딘가에서 잡내를 제거한

다이닝 특유의 고급스러운 기술이 엿보였으며

판체타 소스라고 하니 또 돼지로 우려낸 소스겠죠?

짠맛을 더해 간을 조절해주며 고기가 촉촉하게 수분을 가해주고

고기 표면의 그릴향과 완벽하게 어우려졌습니다.

 

가니시에서는 뭐 퓨레도 양파도 맛있었습니다만

저 하얀 채썬게 청사과채. 저게 껍질을 벗기지 않은 청사과를 잘게 채썰고

무엇인가에 담궈 숨을 죽였다가 올려 내줘 곁들여 먹으면

청사과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향이 과하지 않게 적절히 고기와 어우려져

감칠맛과 중독성, 상쾌함을 더해주는 부분이 즐거웠습니다.

 

지금 또 다시보니 이 친구의 가격이 38싱달...

아무리 세전가격이고 전문 다이닝이 아닌 술안주 겸사라지만

포포먼스에 비해 몹시 저렴한 가격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겠습니다.

 

Old Fashioned

식전주와 좋은 요리가 나왔으니 최애 칵테일로 이어가야겠죠!

최애 칵테일이자 처음 방문하는 칵테일바인 경우 거의 무조건 첫잔으로 주문해

제 나름대로 바의 수준이나 취향, 방향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클래식 칵테일, 올드패션드입니다.

 

미국 버번 위스키 기반의 칵테일이라 도수가 꽤 높으면서도

각설탕과 비터스가 들어가 달콤쌉사름한 맛이

단독으로 마셔도 좋지만 육류 음식과 금상첨화입니다.

 

요녀석은 내가 살면서 마셔본 올패중에 최고로 맛있다! 까지는 아니였지만

사실 그건 제 취향과 그날그날 컨디션, 바텐더간의 스타일 차이일 뿐이고

아틀라스 바의 올드패션드는 다크체리향이 쌉싸름하면서도 묵직하게 나는게

중후하면서도 다른 바들과 차이점이 느껴져 독특하고 좋았습니다.

 

하쿠슈 12년

칵테일을 마셔봤으니 다음은 위스키 차례

쉽지 않은 기회인만큼 들떠서 귀한 위스키를 주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고숙성연수로 갈수록 지나치게 비싸지는 감이 있었고

뭣보다 이 친구가 이전편에서 보여드린 오차드로드에서 사온 위스키와 같은놈입니다.

 

제 선택이 틀렸는지 아닌지 한번 더 확인해보기 위해

(뭐 틀릴리도 없고 틀려도 환불할 일도 없긴 하지만)

똑같은 놈으로 주문해봤습니다. 맛은? 당연히 맛있죠.

위스키에 대한 감상은 상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만

재패니즈 특유의 섬세한 꽃향이 나면서 청사과 향과 맛이 나 독특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잘 샀네요. 저와 한국으로 돌아갈 값어치가 있다는게 증명되었습니다.

 

아 그리고 또하나 색달랐던 점이

한국 바에서 위스키를 잔 단위로 주문할경우 무조건 글랜캐런 글라스에 담아주셨는데

(밑이 넓고 주둥이 부분으로 갈수록 좁아져 향을 모아주는 형태)

싱가폴에서는 대부분 그냥 널찍한 온더락 잔에 담아주시더라구요.

이러면 위스키 향이 다 날아갈까봐 부정적인 평이 있었는데 이번에 그 편견이 깨졌습니다.

그... 미국 영화에서 나오는 모습을 따라하다보니 뭔가 색다르고 멋있는 느낌

 

이렇게 마시는 방법은 한국으로 돌아와 저도 집에서 채택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배운걸 써먹다니 이보다 더 좋을수도 없겠네요.

 

술 들어간다고 영어회화실력이 더 상승하진 않더라

뱃속도 넉넉해지고 취기도 올라 아늑한 분위기에 편승했겠다

앞에서 분주하게 제조하는 바텐더분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영어로)

위스키 좋아한다 한국에서 왔다 오늘 여기를 제일 기대했다

그놈의 촉새같은 입을 나불나불 터니 바텐더 취향 위스키라고 서비스로 조금 주셨습니다.

ㅎㅎ 역시 나야

 

처음 보는 놈이라 잘 모르겠지만 이름이 발러 라네요.

일본 사케처럼 생겨놓고서는 미국 LA 생산 위스키고 ㅋㅋ...

향에선 라벤더같은 아로마틱한 향수 향이 나 기대감이 한껏 올라갔는데

정작 마셔보니 맛 자체는 좀 씁쓸하고 가벼워 별로였습니다.

그래도 서비스로 마신거니 아쉬울 부분은 없습니다.

 

처음 먹어보는 크림브륄레. 커스타드 크림의 겉을 토치로 바삭하게 그슬린 프랑스식 디저트
Asia's 50 Best Bars 수상패

마지막으로 이 집의 자랑, 진&토닉을 주문했습니다.

 

아틀라스 바는 거대하고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로 유명하지만

술쟁이들한테는 전세계에서 모인 수백가지 라인업의 진,

거기에 이 집에서 자체 연구개발하여 생산해낸 진들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유명하다고 하니 안마시고 돌아가면 섭하겠지요.

바텐더분께 가장 유명하고 시그니처인 진토닉을 주세염 하고 말씀드렸더니 나온 친구입니다.

 

토닉워터는 따로 주셔서 재량껏 타먹으라 하는데 이 부분은 다른 분들 보면

호불호가 약간 갈리긴 합니다만 저는 재밌고 괜찮았습니다.

당도나 떫은 정도를 제 입맛에 맞게 조절해가면서 먹을수도 있구

 

바텐더의 변형 기술이 들어가지 않는 진&토닉은 재료 그 자체의 순수한 맛이 나기 마련입니다.

아틀라스 시그니처 진에서는 오렌지껍질의 쓴 맛이 과육의 단 맛과 같이 나서

신선하고 리프레시 되는 감상이였습니다. 맛있네요. 더운 싱가폴과도 잘 어울리고.

 

기왕 온 김에 시그니처 칵테일 한잔 정도를 더 마시고 싶었으나

배도 부르고 하루 일과가 끝나가며 쌓였던 피로가 녹진녹진 풀리니

평소보다 취기가 꽤 빠르게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이쯤에서 무리하지 않고 빠져줍니다. 제 뒤에 기다리는 손님들도 배려할겸

밤도 늦었고 타지이니 행실에 유의하며 적당히 만족하고 돌아갈 때가 됐나봅니다.

 

끝나고 계산하는데 의외로 가격도 한국 바랑 비슷하더라구요.

세금 붙은걸 고려해봐도 확실히 싱가포르 바들이 값이 싼편인듯 합니다.

 

나가기 전에 바 뒤쪽 타워에 올라가서 실내 전경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방문객들 모두 신나서 열심히 인생샷을 뽑아내려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저도 술마시고 훈훈해져서는 다른 커플들 사진도 찍어주며 자비를 베풀고 있는데

걔중 한명이 '너도 사진찍어줄까?' 라고 물어보는 말에 괜찮다 거절했습니다.

혼잣말처럼 '후회할텐데...' 하는걸 적당히 흘려들었는데

지금와서 곰곰 생각해보니 그 친구 말처럼 한장 정도는 컨셉샷 찍는것도 나쁘지 않았겠네요.

 

하도 혼자 여행다니고 잘생긴것도 아니여서(ㅎㅎ;) 셀카 안찍는게 버릇이 들었습니다.

하여 제가 여행다니며 찍은 사진에는 정작 제가 들어간게 몇장 되지 않네요.

 

저 그림 뭔가 우리나라의 일월오봉도 느낌인걸...
Exit

사진 한번 많이도 찍었네요.

슬슬 그만하고 호텔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호텔 근처 차이나타운의 연등장식

배부르고 술 들어가서 알딸딸하니 매콤한 국물 생각이 나서

편의점에서 우리나라 컵라면 하나 사서 끼려먹고 잠들었습니다.

건더기가 많고 김치사발면 맛이 나네요. 사진엔 안보이지만 농심 로고도 붙어있습니다.

 

 

아틀라스 바는 이 2일차 일정에서 가장 좋았던 장소이며, 동시에 약간 스포일러긴 하지만

모든 여행 일정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장소가 되겠습니다.

 

저녁에 비 맞으며 은근 뻘짓하고 식사도 스킵한것 정도는 싹 해소됐습니다.

내가 왜 비싼 돈 내고 이역만리 싱가폴에 굳이 왔는지를 증명하는 단 하나의 장소로 꼽고싶으며

다른 무엇보다 이 순간이 가장 좋을것 같다고 출발 전부터 예상하며 기대를 한껏 끌어올렸고

직접 방문해보니 그 기대조차도 뛰어넘으며 증명해낸 인생 최고의 바였습니다.

 

동시에 압도적인 인테리어 덕에 어디를 찍어도 예쁜 사진을 얻을 수 있었고

보여주는 지인들마다 혀를 내두르며 멋지다고 칭찬하는 것을 듣다보니

저 또한 덩달아 뿌듯해지며 자부심마저 느껴집니다.

 

여행을 통해 내가 나로서 가장 완벽해지는 순간의 일편을 더해서 더할 나위없이 좋았습니다.

이 감상을 적어내리는 지금도 또 가고 싶으면서 동시에 당장 가고싶지 않은게,

지금의 여운을 곱씹으며 다음 방문까지

다채로운 다른 경험들을 쌓아두고 재방문하고 싶어지는 경이로운 장소였습니다.

 

3일차는 휴양지 섬 센토사 방문이 주가 되겠네요.

다음 날짜에 이어서 작성하겠습니다~